김현진 샘의 교단일기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1960년대 후반에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를 보면서 “처음으로 세계가, 아니 적어도 학생 이념가들이 살던 세계는 참으로 세계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 시기에 로마, 파리, 베를린 , 함부르크, 프라하, 도쿄의 대학가에서는 동일한 담론이 퍼져갔다.

   
▲ 강원사대부고 김현진 교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일하게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68운동에서 학생들은 기성의 권위주의에 저항했으며 전체주의와 전쟁에 반대했다. 또한 소비 사회를 비판하고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으며 낡은 세계에서 소외되었던 흑인과 여성,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를 포괄했다.

특히 68운동은 이러한 주장을 새로운 개념과 상상력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한 말과 구호의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말과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함으로써 이후 사회 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68운동>, 이성재 저, 책세상 Vita Activa 개념사 시리즈 12, p69.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빽바지 입은 싸가지’ 유시민의 변신. 2017년 2월 4일자 한국일보 기사 제목이다. 작가 유시민이 정치인이던 시절, 그는 2003년 4월 재보궐 선거에 당선된 후 의원 선서를 위해 남색 면재킷에 흰색 면바지를 입고 국회에 등장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오~ 신선한데?’라고 감탄했었다. 그러나 웬걸? ‘저런 옷차림으로 국회를 무시한 사람에게 의원 선서를 받을 수 없다’며 한나라당 의원 30여 명이 집단 퇴장하고, 여야 수석부총무는 협의에 나서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양심의 문제이니 타협 대상이 아니다’라며 만류하고, 급기야 국회의원 선서는 다음날로 미뤄졌다.

이튿날 그는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와 무사히 의원선서를 마쳤지만, 이 ‘빽바지 소동’은 ‘싸가지 없는 진보’의 이미지가 훗날 폭발적으로 유통되게 만들었다(기사인용). 나는 다음날 2:8 가르마에 정장을 입고 국회에 등장한 유시민의 모습에 실망했고, 이후 유시민의 이미지는 똑똑한데 싸가지 없는 진보로 생산되었다. 그나마 요즘은 그 이미지가 많이 바뀐 듯하다. 오죽하면, 유시민을 국무총리로 추천하자는 청원운동까지 있었겠는가?
 

   
▲ 대림대학교 입학처 https://goo.gl/t5iQC2


68운동, 개인을 응시하게 하다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파괴의 열정은 창조적 희열이다’를 외치며 전세계 ‘싸가지’들을 들고 일어나게 했던 68운동. 이전의 시대가 ‘전체’와 ‘국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던 것에 거부하고, ‘개인’의 중요성, 그리고 개인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을 거부하는 움직임인 68운동에 대하여 이번 겨울 방학 연수에서 어렴풋이 접하고 찾아본 책이 바로 ‘68운동’이다.

그저 막연하게, 서양 현대사의 흐름에 무엇인가 영향을 주었지, 라고 알고 있던 68운동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닌 이상 접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과서의 세계사 부분은 주로 2차 세계 대전에서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내가 학교 다닐 때 기준). 그런데 이번 연수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서양 현대사에 막강한 영향을 준 것은 68운동이라고 보는 게 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신중심)의 시대에서 개인(인간중심)의 시대로 이행한 역사적 사건이 내가 배운 역사적 지식에서는 고작해야 르네상스 운동이었는데, 르네상스 운동은 너무 오래 전 사건이 아닌가? 더구나 양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개인의 삶은 철저하게 국가 폭력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그 이후 어떤 일이 있었기에 다시, ‘개인’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시대가 되었는가? 에 대한 의문을 다소 풀어주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68운동이었던 것이다(내가 이해한 바로는) 아, 이제 알겠다.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에서 왜 68운동을 다루지 않거나, 한 줄에 그치고 후딱 넘어가는지를.

1960년대부터 1980년대를 지나, (잠깐 87년 민주항쟁이 있었기는 하지만) 2017년에 이르기까지도 아직 우리 사회는 ‘개인’을 얘기하거나, 터럭만큼의 저항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인 것이다. 개인을 이야기 하는 순간, 너는 왜 조직과 국가를 생각하지 않느냐? 국가(학교)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냐? 는 등의 비난에 직면하는 데 누가 개인을 이야기하며, ‘개인’을 얘기하기 시작한 68운동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큰일 날 일이다.

개인을 배제하는 공동체의 폭력
우리는 어쩌면 ‘공동체’라는 단어의 오독 아래서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을 소홀히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유시민이 입고 등장한 옷이 내가 가끔 입는 붉은 색 정장 바지나, 스커트도 아니고 단지 면재질의 ‘빽바지’였는데 그 빽바지가 국회의 권위를 무시한 거라면, 그 정도 귄위 밖에 없는 국회라면 존재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 학부모 필독서 '달라진 입시, 새판을 짜라!' https://goo.gl/VKIShu

학교도 마찬가지다. 교복위에 외투를 입는 것이 학교의 교칙을 어기는 것이고, 그것이 학교의 전통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논리는 너무나 허술하다. 학교는 어쩌면 추상적 공간이다. 그 추상적 공간의 권위가 개인의 존재함과 그 개인의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인가? 학교는 그러한 곳인가?

학교는 어떤 곳인가? 따르지 않고, 싸가지 없고, 못하는 ‘것’들을 배제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만 함께 하는 ‘교육공동체’인가? 그렇다면 학교의 교육이 공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주로 기존 체제를 잘 따르며 그것이 불편하지 않았던 분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무엇이 먼저인가? 개인? 아니면 개인이 속한 사회와 국가, 그리고 학교? 나의 답은 이미 말씀드렸으니, 독자들의 답은 무엇인지 이 책을 읽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 보시기를 권해 본다.


추신. 백남준은 비디오 아티스트일까? 다다운동의 선두주자일까? 왜 우리는 백남준을 미술 교과서에서 ‘비디오 아티스트’로만 가르칠까?

우리는 어쩌면 ‘공동체’라는 단어의 오독 아래서 공동체의 구성원인 ‘개인’을 소홀히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학교는 어떤 곳인가? 따르지 않고, 싸가지 없고, 못하는 ‘것’들을 배제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만 함께 하는 ‘교육공동체’인가? 그렇다면 학교의 교육이 공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에듀진 기사 원문:http://www.eduj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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